기독교나 불교는 국내외적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종파가 많습니다. 무속인들도 저마다 제가 모시는 신이 최고라고 주장합니다.
역술인 들은 2~3천년 전의 중국 이론이 최고 최선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세상을 미혹케 하는 종교인이나 속세의 무속인들로 인해 세상사에 지친 중생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고 있으니, 어찌 안타깝다 하지 않겠습니까?





내림굿으로 신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무병이나 신병으로 고통을 받다가 어쩔 수 없이 신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신을 받았을 때 무얼 할 것인지 계획이나 준비가 없었으니 무슨 신념이나 철학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원천적으로 인간들의 삶에 대한 조언을 해줄 처지도 못 되는 무당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 자신들의 조상들이며, 그 조상들도 살면서 포부를 다 풀지 못한 원과 한이 많은 영들입니다.
조상이 아니라도 대부분의 몸주들은 원 많고 한 많은 영들입니다. 단종이니, 최영장군이니,공민왕이니 하는 분들인데 일부 능력이 있다고는 하나, 궁극적으로 천도시켜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복잡한 세상사를 어찌 그런 정도의 영들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무당들이 어떤 원리나 진리를 깨우친 것이 아니기에 전해오는 대로 답습을 합니다.
예를 들면 굿을 할 때 배고픈 귀신이 오면 무당들은 정신 없이 밥을 먹습니다. 나중엔 언제 자기가 그렇게 많은 밥을 먹었느냐고 되묻기도 합니다. 무당들 중 어떤 사람들은 정기를 받겠다며 높고 깊은 산으로 기도를 갑니다.
자기네들이 모신 신보다 영험이 있는 산의 정기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모시는 영보다 더 영험이 있는 그 영을 모시면 번거롭게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도 무당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해원 굿을 할 때 자기가 모신 신이 영험이 있다면 자신의 법당에서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조상들 무덤까지 가는 것이겠습니까? 조상들을 부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당들은 모두가 자기가 모시는 영이 최고라고 주장합니다. 그 영들이 그렇게 말을 하더라도 분별할 능력이 없으니 그런 것입니다. 몇몇 무당의 법당에는 줄기가 다른, 수많은 영들의 명호를 붙여 놓고 있습니다.
졸병이 백 명 이면 무엇 합니까? 장수 한 명이면 족할 텐데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최고의 신을 모셨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남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정기를 받겠다고 이 산 저 산 다니고, 준비 없이 신을 받다 보니 세상사 흐름과 공부도 뒤떨어져 오시는 분들과의 대화도 원만하게 행하질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도 옳게 영위하지도 못하고 신도 옳게 다스리지도 못하면서도 꿈을 깨지 못하는 것이 무속계의 현실입니다.




신병이나 무병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행운으로 여겨야 할 텐데,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자기는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욕심을 부립니다.
멀쩡한 사람이 죽게 되었다느니, 아이에게 문제가 있을 것이니 예방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느니 해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런 무속인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고달픈 인생사를 견디지 못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속인들을 찾는 일반인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주에서 중시하는 것이 태어난 시간입니다. 예전에 시계가 없던 시절에 태어난 시를 물으면 "아침에 닭이 울고 조금 있다가" "저녁밥을 준비하다가 산통이 와서 방에 들어갔는데" 등등 주먹구구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통.통신이 발달한 지금도 인구통계를 내는데 연인원을 수 만 명을 동원하고도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런데 3천년 전 누가 어떻게 그 넓은 중국대륙을 돌면서 통계를 냈다는 말입니까?

사주나 팔자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면 "인생상담이라 생각하고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역학을 하는 이들도 어떤 영적인 힘을 얻기 위해 산으로 들로 기도를 다닙니다. 다만, 그들은 자기들이 받은 영적인 교감의 뜻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역학이라는 수단을 사용할 뿐입니다.

더 더욱 웃기는 것은 원리나 진리도 옳게 모르면서 역학을 속성으로 가르쳐준다고 수강생들을 모집하는 일입니다. 몇 개월 속성으로 공부해 어찌 남의 인생을 상담해줄 수 있다고 하는지 안타깝고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수한 대학을 졸업하고 높은 학위를 취득했는데도 변변한 직장 하나 구하지 못해 실업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반 직장에서도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을 성직자연 하는 사람들이 공공연히 자행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런 사람들을 일부 신자들이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종교인들과 일부 간부급의 신자들이 결탁하여 나쁜 짓을 저질러도 누구 하나 막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반 신자들은 그들 종교인들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교회나 절에 다니지 않습니까?
배워야 할 자들이 자기네들을 가르치는 자들의 잘못을 용인한다면 그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국왕의 보호아래 크게 융성했던 불교가 부침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불교가 무한한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최고의 경전으로 삼고 있는 “금강경”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相)에 집착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불교는 어떻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상에 집착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불교자체가 타락하고 부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불교인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국 사찰에서 대규모 불사를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도 많이 들리고, 몇 년 전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취임하신 분이 불교인들이 자질에 대해 조사했는데 불교의 기초교리에 대한 학습도 받지 않은 불교인들이 너무 많아 재교육 계획을 포기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돈 없고 불쌍한 여인이 부처님 가시는 길에 불을 밝혀 드리려고 남에게 돈을 빌려 촛불을 밝힌 것이 연등의 시발인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등도 커야 좋고 부처님 바로 눈앞에 등을 달면 부처님이 많이 보시고 복도 더 많이 주는 것처럼 신자들을 호도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니, 이런 모습을 지켜보시는 부처님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승려들의 공공연한 일탈행위로 사회적 지탄을 받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표리부동한 행위를 하면서 어떻게 신도들에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불교에서는 49제라는 아주 간편한 형식이 있습니다. 종교가 없는 일반인들 상당수가 불교의 49제를 활용해서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 중생들은 몰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불교인들이 중생들을 미혹시켜서는 안됩니다.
불가와 인연이 없는 사람들도 49제를 치르면 모두가 해탈하여 극락 가는 것입니까? 불교인 여러분들은 죽은 영혼들을 49제를 통해서 극락으로 인도할 자신과 능력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49제를 치를 때 꼭 그렇게 많은 재물이 있어야 합니까? 돈이 없는 영혼들은 어떻게 합니까? 조상들의 천도제는 왜 그리 자주 치르게 합니까? 부처님께서 돈 많은 사람들만 극락으로 갈 수 있다고 했습니까? 진언이나 다라니를 외우는 사람에게는 복이 오고, 사람에게 붙어있는 잡귀들도 다 떨어지며 이것을 읽는 사람의 옆을 스쳐 지나만 가도 복이 들어온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그런 능력이나 효험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승려 한 사람이 동남아에 있는 나라에만 갔다 오면 진신사리를 갖고 들어와 봉안식을 한답시고 법석을 뜹니다.
친견하는데 얼마씩의 헌금을 내놓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도처에 왜 그리도 많은지? 부처님께서 그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불경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부처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진정으로 부처님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도 열반에 드실 때 "지금까지 난 한 마디의 법문도 하지 않았다.
나를 따라서는 절대 해탈의 경지에 들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인 여러분들은 극락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습니까?
2,500년전에 살았던 부처님을 직접 만나 보시려면 먼저 영통을 하셔야 합니다. "부처를 잘못 모시면 계시라는 부처는 안 계시고 잡귀들만 우글거린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부처도 "나를 따르지 말고 나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그렇게 강조하고 또 강조했건만 가르키는 달은 보지 않고 그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만 쳐다만 보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한없이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항상 겸손하고 겸허한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머리를 깍고 먹물 옷을 입었다고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로 정도를 걸을때 존경받고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02년 9월 11일, 9.11사태 1주년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수 천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면서 조화를 현장으로 던지고 개인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추모행위와 조상들에 대한 제사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형태만 다를 뿐 서양에서는 제사대신 추모식을 거행하는 것 아닙니까?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라고 부정하는 행위가 과연 옳은 행위입니까? 우리를 이 세상에 살도록 인연 맺어준 조상들을 부정하면서 어떻게 인생의 참뜻을 찾겠습니까?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죽기 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였다면서 천당으로 갔다고 설교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회개만 하면 천당으로 갈 수 있다면, 이 바쁜 세상에 구태여 예수를 찾을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예수 앞으로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 온지 개신교는 100년 남짓, 천주교는 200년 남짓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천당 갈 수 없다면, 예수를 몰랐던 우리 조상들은 전부 지옥으로 떨어졌습니까??

종말론을 펼치고 자신을 재림예수라고 자칭하면서 일반 신도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는 사례들만도 부지기수입니다. 예수를 모시기 위해 크고 많은 교회가, 화려하게 치장한 교회가 왜 그리도 많은 것인지??

깨끗한 곳에서 기도하라고 예수가 말씀을 하셨다면 이해할 수 있으나, 호화찬란한 이런 곳에서 기도하라고 했으면 그분이 틀리신 것입니다.
한 건물에 두 세 개의 교회가 입주해 있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기독교단체를 말하는 명칭 중에 기독교는 무엇이며, 예수교는 무엇인지, 또 한국은 무엇이며, 대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왜 그리도 많은 단체가 필요한지, 기독교의 본질과 무관한 모습들이 분별없이 표출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각지에 종교로 인한 분쟁도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교도간의 분쟁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같은 기독교간의 분쟁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성직자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사례들이 표출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직접 작성하지 않은 그 성경에 빠져서는 예수를 바로 알기가 불가능합니다. 예수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바깥에서 안에 있는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그래야 예수의 진면목을 바라보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렇게 널리 퍼진 것은 서구제국의 국가권력의 힘이 작용했습니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국가권력이 앞장서서 옹호 했을때 급진적인 교세팽창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 구미제국에서는 교회에 노인들만 모이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징조는 없는지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주교는 예수 당시에는 핍박을 받다가 로마황제의 후광을 입고서 근 천년 이상 독점적 위치를 차지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루터와 칼뱅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교회가 썩었다고 주장했을 때의 느낌은 어떠했는지요?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를 세운다고 경비를 추렴하다가 종교개혁이란 벼락을 맞은 것 아닙니까?
하늘의 일을 인간들이 어찌할 수 있다고 면죄부를 판다느니 설치다가 그런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성지회복을 명분 삼아 십자군전쟁을 일으켜 얼마나 많은 이슬람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여러분들의 교리가 원칙적으로 옳고 바르다면 그런 이단들이 나타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을 죽이고 있으면서 사람을 살리려는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그 종교 창시자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중세 로마시대 수도원을 발굴하다가 지하밀실에서 엄청나게 많은 영아들의 유골들이 발견되었다는데, 신부와 수녀들만 있는 그 곳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성녀로 추앙 받은 테레사 수녀가 임종 시에 머리가 너무 아파서 엑소 시즘을 행했다는 기사가 났는데, 그 일이 사실입니까?
천주교의 교리를 충실하게 수행하다 죽으신 분들을 복자와 성인으로 추앙하는데 과연 우리 인간들이 그런 위치에 있다는 말입니까? 인간들이 그렇다고 추존 하면 천국에서도 그렇게 인정이 되는 것입니까?

천주교에서 잘못하는 바람에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고, 그 종교개혁의 여파로 얼마나 많은 종파가 발생했습니까? 형제간에 다투면 부모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신교와 구교는 같은 분을 모시는 사람들 아닙니까?? 남보다 못하게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니, 여호와가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과연 예수가 전쟁을 일으켜서 남을 죽이면서까지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까? 아니면 인간들 욕심 때문에 그런 행위를 저지른 것입니까?예수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교회를 운영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생활실천적인 사상이라는 유교가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관념적,형식적으로 변했습니다.
성리학이라는 이름아래 얼마나 많은 잘못이 자행되었습니까? 조선시대 수많은 사화들의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서로 죽이고 죽이는 피의 역사가 사화인데 이것의 이론적 틀을 제공한 것이 성리학이었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이 사람을 죽이라는 것이었습니까? 모두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욕심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수 천년 전 춘추전국시대의 공자는 세월이 흐르면서 세속의 지도자에 따라 아주 뛰어난 성현으로도 대접받기도 하고 만고의 역적으로도 핍박을 받아 왔습니다.
공자가 그 당시에 무슨 말을 했다 하더라도 시대가 변한다고 공자가 되살아나서 이런 말 저런 말을 다시 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중국의 역사를 볼 때 난세에는 공자를 매도하고, 사회가 안정 되었을 때는 칭송한다고 합니다.
정치지도자들의 취향에 따라 엿가락 늘이듯 공자를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며 실천한다는 유림의 사람들은 과연 공자가 말한 '중용'의 의미를 옳게 알고 있습니까? 수박 겉핥기 식으로 본뜻은 모르면서 겉으로 나타난 형식에만 치우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도 때만 되면 두루마기를 입고 “으흠" 기침하며 뒷짐지고 여덟 팔자 걸음을 걸어야 옳게 처신하는 것이라 믿고 따르는 그 모습이 진정 공자가 원하는 가르침일까요?

내가 알고 있는 경험이나 지식의 틀로서 공자를 바라보려 해서는 절대로 공자를 바로 알 수 가 없습니다. 작금에도 관습이니 전통을 들먹입니다. 과연 공자의 본뜻을 알고 그러는지, 아니면 습관적으로 그런 주장을 하시는지 의문입니다.
우암 송시열 시절에 그렇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관혼상제가 지금 이 시대에도 완벽하게 적용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당시에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그 사상도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교의 발상지라는 중국에서도 이미 없어진 동성동본 불혼제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많은 선남선녀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습니까? 칠거지악이니 삼종지도,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남성편의주의적 악습으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희생을 강요했습니까?
지금도 만약 예전의 관습이나 전통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면, 모두가 결사 반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도저히 그 전통이나 관습을 지킬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특정사안에 대해 전통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조상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처럼 큰소리친 것이 현실 아닙니까?? 좋은 정신이나 사상을 배워야겠지만 본뜻을 현실세계에서 적용하고 활용하는 것이 되어야지 무작정 형식만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라는 사람은 21세기를 살아갈 우리의 좌표라면서 중국의 노자를 말합니다. 몇 천년 전의 노자가 어찌 알고 21세기의 좌표를 말했다는 것입니까??

서양의학의 최첨단을 걷는다는 미국에서는 현대의학의 한계를 느끼고 대안을 찾겠다고 하는데, 우리들은 그 들을 따라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히고 말 것입니다.

우리 지식인들은 누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이론을 개발했다는 사실 자체만 강조합니다. 외국의 석학들이 그런 이론이나 원칙을 찾게 된 이유나 배경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입니다.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있고, 방향을 명확하게 설정한 후에 남의 지식이나 기술을 도입하여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남의 것을 따라 하고 모방하는 것도 필요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런 좋은 것들을 우리 것으로 소화시키는 것이겠지요.

이 모두가 지식인들의 지적 자존심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지나친 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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