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님 말씀 걸어오신 길
 
 
 
자기가 모시고 있는 영이나 신령이 거의 전지전능한 것처럼 말하지만 자신들의 일도 옳게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칠월 칠석 날, 내 고향인 부산시 기장군 동부리 당산에서 천문을 열었습니다.
내 할아버님과 외할아버님께서 앞장서시고, 기장 고을의 산왕과 용왕도 강림 하셨습니다. 이런 분들께서 강림하시면 다된 줄 알았는데, '수로 대왕님도 오시니 받들어 모셔라' 라는 것입니다.

"아하! 내가 김해 김가이니, 시조 할아버지로 나에게 강림하시는 것이구나" 하고 한숨을 돌리려는데, 또 "관세음보살이다" 하시며 내려오시고, '용왕, 산신'이라시며 강림하시고, 그리고 나서는 "나반존자께서 오시니 받들어 모셔라" 하는 분부에 깜짝 놀라 동쪽 하늘을 쳐다보니 저 멀리에서 존자님께서 저에게로 다가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촛불을 새로 밝히고 깨끗한 소금에 향을 피워 존자님을 받들어 모셨습니다. 그리고 약사여래불께서도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또 칠성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오신 어르신들께서는 모든 분들께서 "어렵고 힘든 중생들을 위해 복도 주시고 돈도 주시겠다" 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칠성전에서 하시는 말씀
"큰 어르신께서 내려오시니 다들 조용히 하라"
그러자 지금까지 큰 잔칫집 같이 시끌벅적 하던 주위가 적막강산처럼 일순간에 조용해지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자, 곧 "걱정 말아라. 내 상좌야!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내가 왔다. 내 상좌야"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또 "고생 많았다, 이제는 걱정 말고 『중생 제도』네 글자만 가지고 생활하거라" 하셨습니다.

약 4시간 반 동안 걸쳐서 분부들을 받으면서도 한마디의 질문도 드리지 않았는데, 불현듯, "중생들에게 높으신 어르신의 명호를 무어라 가르쳐야 합니까?" 라고 여쭈었습니다. "하나님으로 불러라 하거라. 그리고 오늘부터 3년간 기도하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서 장장 4시간 반 동안의 모든 기도가 끝났습니다.
너무나 나 자신의 삶이 안타까워 100일 기도 끝에 그 어떤 새 삶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 죽으려 작심을 하고 기도에 들어갔었는데, 앞으로 3년간 기도를 하라 하시니 죽지는 않아도 되겠구나,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면 새로운 삶을 살아갈 길을 열어 주시겠지 하는 당당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옆에서, 많이 나를 도와주신 분에게 여쭤 보았습니다. "내가 오늘 이렇게 한 것이 소위 말하는 천문과 말문을 열었다는 것입니까?" 하고 묻자 "김 선생, 내가 천문을 연지 30여년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천문을 열게 해 주기도 했고, 남들이 하는 것도 많이 보았지만, 김 선생처럼 하는 것은 그 전에 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손뼉을 쳐서 그 진동으로 당산의 벽이 터져 날아가 버리고, 소리를 질러 그 힘으로 당산의 지붕아 날아가 버려라' 하고,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를 했습니다. 나도 조금은 인간답게 살고 싶었습니다.









연년생의 형이 하나 있는 4남 1녀 중에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 형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에, 나도 학교에 가고 싶어 울고 불고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다, 그 이듬해에 입학을 하였는데, 그 때부터 주위의 아이들과 경쟁하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입학 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늑막염을 앓게 되었습니다. 동네 친구들과 기마 놀이를 하다 축담에 옆구리를 받쳤는데, 그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지금의 의학 수준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병이지만, 40여년 전에는 상당히 중한 병이었습니다.

약 4개월의 치료기간 끝에 다시 등교를 했는데, 진도를 따라가기도 어려웠지만, 그런 와중에도 친구들과 경쟁해서 좋은 점수를 받겠다는 생각보다, "이 세상에 많은 과학자들이 발견과 발명을 다 해버리면,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할 일이 없어질 것 아닌가?" 하는 터무니없는 고민만 하다 초등학교를 마쳤습니다.



중학 시절에도 나는 가장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나는 당시에, 부산에서는 유일한 남녀 공학인 학교에 다녔는데, 재학 중에 여학생하고 이야기해 본 적이 거의 없을 만큼 숫기가 없었고, 또 혼자만 흠모했지 감히 말을 건네 볼 요량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인생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중학시절에 입었습니다.
인생이 결정적으로 바뀌는, 그것도 좋은 의미가 아니라 아주 부정적인 의미의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유독 기술교육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각 지방에 5년제의 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공업입국의 기틀을 마련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부산에 있는 학교에 응시를 하였습니다.

필기시험에서 당당히 합격하자, '없는 돈에 공부한다고 고생하더니...' 하고 이웃에서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저도 한없이 어깨를 펴고 자랑스럽게 동네를 활보했습니다.
드디어, 신체검사 날. 같은 날에 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기 위하여 종종 걸음을 치며 가는 같은 또래의 친구들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나는 통과의례와 같은 신체검사를 치르기 위해서 학교에 갔습니다.

내가 앞으로 5년을 다녀야 할 학교 교정을 바라보며 '열심히 공부하여 유능한 기술자로 국가 산업 발전에 일익을 담당해야지' 하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신체 검사장, 신장, 가슴둘레, 시력 등을 거쳐 색맹 검사장에 도착했습니다.
검사를 받는 친구들은 무어라 숫자를 읽는데, 이상하게 내 눈에는 여러 가지의 색이 혼재되어 있는 것처럼만 보이는 것입니다.
이상한 생각이 뇌리에 섬광처럼 스치는 것입니다.

'색약이구나!' 생물 시간에 배운 적록 색약!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
이런 걱정이 들면서도, '우리 집안에 그런 증상을 이야기한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아닐꺼야' 라고 스스로 자위를 하면서 내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내 차례. 책장을 넘기는데 가뭄에 콩 나듯이 숫자가 보이는 겁니다.

그랬더니 시험관이 책임자를 불러, '이런 학생이 어떻게 응시를 했는지 모르겠다' 라는 겁니다. 지금은 색맹을 치료하는 기술도 개발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마는, 그 당시에는 미술과도 색각 이상자는 응시 자격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장애로 취급받았습니다.
시험장을 박차고 나오면서, '교사란 사람들이 이렇게 학생들의 미래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을까? 스승이라고 하는 이들이 과연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을까? 제자를 입시의 현장으로 보내면서 기본적인 것도 확인하지 않고 그래도 스승이라고...'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만감이 교차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낙방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알고 봤더니, 우리 외가에 그런 유전자가 있었습니다.
천형! 그야말로 천형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원망할 수 없는 천형이지요.



어쩔 수 없어 입학한 학교는 실업 고교.
'나는 성적이 좋지 않아서 후기 모집하는 학교에 입학한 것이 아니니 너희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너희들은 성적이 모자라 고배를 마신 것이 아니냐?' 하는 건방진 생각이 항상 마음속에서 떠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과 친밀하게 지날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다른 나만의 생활을 찾아야 했습니다.

'내가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40대의 중년 신사가 되었을 때에는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예쁜 부인과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내 아이들과 같이 조그마한 소곡을 연주하면서 분위기있는 저녁 시간을 연출해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악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는 생각에 취주악부에 가입을 했습니다.

악기라고는 어릴 적 들에서 만들어 불어 본 풀피리가 유일했고, 서양의 금관 악기나 목관 악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었습니다. 색스폰이나 클라니넷 같은 분위기 있는 악기를 다루고 싶었는데 내 치아가 고르지 못해서 파열음이 나기 때문에 그런 악기는 담당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트럼펫 같은 악기도 입술이 두터워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바리톤과 같은 mouth piece가 큰 것만 된다고 하니,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하고 연이은 실망감에 또다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는 뒷전으로 물러 앉았습니다.
2학년 1학기. 나의 성적은 56명 중에 54등. 부모님들께 미안해서 성적표를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다 어느덧 3학년.
다른 친구들은 '취직 준비를 한다, 대학 입시 준비를 한다' 등등으로 여념이 없는데 나는 아무런 대책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심히, 아니 정신없이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수학 참고서 대금, 그러니까 책값이죠. 그 책값을 내지 않았다고 수학 선생으로부터 약 한시간 정도 매를 맞고 교실을 뛰쳐 나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학교 바깥으로 나와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할 줄 아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 '내가 만약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성적이 좋았다면 장학금은 주지 못할 망정 나를 이렇게 취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머리를 획하고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래, 복수하자!'
'그것도 다른 방법이 아니라 바로 이 수학책으로 공부하여 성적으로 복수하자!' 하고 그 날 저녁부터 각성제를 먹으며 공부했습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거기에다 주일에는 교회 학생회의 회장으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각성제를 한 알만 먹어도 잠이 오지 않더니, 나중에는 네 알, 다섯 알을 먹어도 잠이 퍼붓듯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8개월, 예비고사를 칠 시점이 다가오는데 또 독한 독감이 유행하여 근 20여일을 아팠습니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작심하고 약 8개월 동안, 등을 방바닥에 붙이고 잠을 잔 날은 약 30 일 정도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내가 바라던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이 인정할 만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에 입학은 했는데, 입학하자마자 데모는 왜 그렇게 많이 하게 되는지. 3선 개헌 반대, 교련 반대 등등...
학비를 벌어야 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데, 이것도 자리가 잘 잡히지 않고, 책을 살 돈도 없으니 공부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또 건방진 생각이 발동했습니다.

'대학 교육의 질이 너무 낮다'느니, '교수들이 실력이 부족하다'느니, '대학 생활은 연구와 낭만이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교수들의 교수법이 중.고교 때와 별 차이가 없어 흥미가 유발되지 않는다'느니, '미국식의 토론식 교육이나 사례연구를 통해 현실에 바탕한 실질적인 교육이 되어야 한다' 등등의 어처구니 없는 생각에 빠져서 본연의 의무를 망각하고 세월을 흘려 보냈습니다.
(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내 생각이 옳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1학년, 2학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불행은 파도처럼 겹쳐서 온다더니, 어머님께서 자궁암 판정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삼학년 일학기를 휴학하고 말았습니다.
남에게는 어머님 병간호를 위해서라고 말을 했습니다마는. 실제로는 학비가 없어서지요.

일학년 때에 통일교 계통의 서클에 가입을 했는데, 그들이 '세계승공연합'이라며 승공을 앞세울길래 처음에는 통일교에서 대학생들을 포섭하기 위한 조직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내 마음에 와닿는 것도 많아 열심히 따라 다녔습니다.

1971 년에, 대연각 호텔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연(然)자를 연소할 연(燃)자로 해석해서 크게 불탈 집으로 작명되었기에 큰불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기발한 착상에 깜짝 놀랐습니다. 젊은 혈기에다 만사가 궁금할 때에 정말 너무나 아귀가 맞는 이야기였습니다.
반공도 아닌 승공을 주장하니, '아무리 데모를 해도 공산당들은 죽여야 마땅한 인간들인데' 하고 생각하니, 종교적인 사상은 별개로 해도 그 이론이 너무나 과학적이라 한동안 심취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분야에 들어서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실망 끝에 결별을 하였습니다.
35개월 15일의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하니, 남은 기간은 약 일 년. 대학 4년간의 공부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취직하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습니다.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취직하자'고 작심했습니다.

1977년 8월. 드디어 취업하였습니다.



첫 직장은 울산에 있는 대기업이었습니다.
그 때에는 울산이 개발된 초기라서, 방어진 구석에서 생활하다보면 사회에서 격리 내지는 뒤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매일 같은 사람과 만나서 일하고, 또 같은 숙소에서 생활하다보니,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간부진의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 독신 생활을 하다 보니, 저녁에는 매일이다시피 술을 먹게 되었습니다. 물론 내가 술을 좋아한 이유도 있었습니다마는, 사회생활 초기에 아무런 저항감 없이 그 현실에 적응한다는 미명하에 술을 마신 거지요.

그것이 술버릇으로 변한 겁니다. 다음부터는 더 좋은 술집과 더 좋은 술을 찾아 다녔습니다.
돈도 죽어 나고, 여러 가지로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약 20년간 술을, 그것도 고급술을 먹었으니 얼마나 생활이 왜곡되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생각하면 직장인으로서는 별로 성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건방진 생각이 발동되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혼자만 똑똑한 것처럼 했는데, 학창 시절과 마찬가지로 지금 생각해도 내가 건방져서가 아니라, 일반인들보다 훨씬 생각이 빨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니 결과적으로 그 조직에 많은 피해를 입힌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회사에서 권고사직 당하듯 퇴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으로 '행복 끝 고생 시작' 길에 접어 들었습니다.




첫 직장을 그만 두고 몇 개월 쉬다 건설 회사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몇 개월의 백수 생활에 얼마나 혼이 났으면, '절대 정년퇴직 때까지 근무할 수 있게 열심히 그리고 건방부리지 않겠다' 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중동에도 파견가서 약 2년 반을 근무했고, 또 국내에서도 열심히 일했는데 이번에는 회사가 부도 직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회사를 인수하게 된 회사의 직원들이 재산실사 차 나와서는 '너희들이 잘못하여 회사가 이 지경이 되지 않았느냐' 고 매도하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처음의 맹세는 잊어버리고 또 회사를 그만 두었지요, 결혼해서 가족이 있는 사람이 말입니다.

그리고 회사를 옮겼습니다.
그 때까지는 아직 젊고, 또 회사를 그만둔 이유를 그런대로 여러 사람들이 알고 있었고 했기 때문에 직장을 구하기가 조금은 쉬우리라 생각 했습니다.

똑같은 결심을 했습니다. ‘정년퇴직을 이 회사에서 해야지. 정말 두 번 다시는 회사를 옮기지 말아야지’ 하고 말입니다. 회사를 옮기고 심기일전하여 열심히 일했습니다.
새로운 사업이라 할 일도 많을 뿐 아니라, 거의 무에서 유를 이끌어 내는 것이라 어려움도 매우 많았습니다.

거래처 신설하랴, 채권 관리하랴, 거기에다 해외 거래처 관리까지 했으니 업무량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한 2년을 하다 보니, 또 주위의 업무집행 태도나 수행 자세가 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 경영자의 경영 방식도 내 마음에 안 들고, 한 구석도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습니다.
내 마음이 그러니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되고, 설혹 내가 의식적으로 행동을 자제한다 해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주위에서 나를 보는 눈이 곱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내 마음은 더욱 회사의 업무에서 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과는 너무나 자명한 것 아닙니까?
의원면직, 또 회사를 그만 두고 백수건달이 되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던 어느 날, '부모님도 연세가 들어가시니까 내가 부모님 가까이에서 기둥도 되고 울타리도 되어 드려야겠다' 는 생각이 불현듯이 뇌리를 스치는 것입니다. 주제넘은 생각이었지요.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부모님 운운했으니까요.
또 다른 핑계거리도 있었습니다. '내가 지방인 부산에서 상경하여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있으니, 친구도 있고 가족들도 있는 부산에서는 좀 더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아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착상이지만, 그때에는 최선의 구상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기를 약 1년, 드디어 직장을 구해서 생활 터전을 부산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여 약 10여년을 보낸 사람이 중소기업에 적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한 문제는 대기업에 근무하는 똑똑하다는 사람들의 실력에도 나름대로 불만스러워 한 사람에게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근무 자세, 사무 능력 등등의 모든 점이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건방진 마음은 여기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난 것입니다.

불과 5-6년 사이에 회사를 네 곳이나 다녔습니다.
그러다 나이가 중년이라는 40대에 접어들자, 이제는 오라는 곳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동안에도 '절대 내 오기로 직장을 그만두지는 않겠다' 라고 수 없이 결심했었습니다만, 이혼도 하고, 고향으로 귀향할 때에 결심했던 것들이 무참히 깨져버릴 때의 뼈저린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었습니다.

그래도 다시 똑같은 일들이 반복될 때에는 정말 사람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욕심은 많고 현실은 따라주지 않고, 하는 일마다 실패만 계속하고 부모님은 물론 형제들에게도 못할 짓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불교에 심취하여 열심히 기도를 다니는 이를 만나 같이 절에 기도를 다녔습니다. 철야 기도도 수 없이 많이 다녔습니다. 어느 날에는 기도 중에 귀신의 형상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종교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종교인의 행위에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여러 가지 모습을 보고 실망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생의 업'이니 혹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지금 이 세상에서 그것을 갚고 있다' 는 등의 이야기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몇 번째의 삶을 살고 있으며, 또 어느 생에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알아야 좀 더 빨리 그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 집중적으로 노력할 텐데,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으니 나로서는 어떻게 할 방안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기도로 그 죄의 사함을 받아라' 하니 앞이 막막했습니다.

내 느낌에 분명히 영적인 어떤 문제인 것 같은데, 기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누구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승려들은 영적으로 행하는 일은 삿된 것으로 취급할 뿐 아니라 그런 능력도 없어 보여, 답답한 마음에 명리,역학 혹은 신을 받은 무당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하는 말들이 '공 줄이 세니 신을 받아라' 하는데, 공 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설명을 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이 다른 일반인들로부터 인정받을 만큼 편안한 삶을 사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믿을 수가 없었지요.

심한 경우, 어떤 역학하는 이는 '죽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 는 말까지 하는 것입니다.
한번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약 100군데 이상을 들러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런 사람들은 그 어떤 원리를 꿰뚫지 못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신을 받들어 모신지 30여 년이 되신 분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신 제자를 많이 배출하였고, 그 당시 그 분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만 기도하고 계신 분이라 다른 이들과 조금은 달라 보여 무릎을 꿇고 부탁했습니다.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그러자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당신이 무식하면 내가 자신 있게 풀어주겠는데 당신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 무식한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순간,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여쭤 보았습니다.
"제가 신을 받아야 합니까?"
"그럼요, 당신에게는 영이 다 와있습니다"
"그러면, 제게 그 방향만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100일 산중기도에 돌입했습니다.

물론 그동안 '1,000만원만 가져오면 신은 받게 해준다' 는 이들도 여러명 있었습니다만, 저에게 그런 거금은 없었습니다.




조상들의 해원 굿을 하고 나서 그 날부터 100 일 산중기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산중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더 더욱 안타까운 것은 어느 분을 찾으면서 기도를 해야 하는지, 또 왜 이런 기도를 하는지, 기도를 하면 어떠한 결과가 나타날 것인지 등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기도를 시작했으니, 그야말로 남이 장에 간다니 거름 지고 장에 가는 형국이었습니다.

그 전에 기도할 때에 사람과 사물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요 라고 기도한 경험에 비추어 처음에는 무조건 빌었습니다. 초와 향을 준비할 돈도 없었으니 참 기막힌 현실이었습니다. 조상들의 해원 굿도 외상으로 했으니까요.

처음 일주일 동안에는, 매일 손바닥을 비비기만 했습니다.
왜? 비비는지, 누가 비비게 하는지?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아무 생각 없이 비비기만 했습니다. 한 보름 정도가 지나자, 어렴풋이 그 뜻이 무엇인지 느낌이 조금씩 오는 것 같았습니다. 소리도 크게 질러 보고 싶기도 하고 목탁을 세게 두드리고 싶은 느낌도 오는 것입니다.

기도에 들어간 지 30일이 되던 날, 나를 도와주시는 분과 어느 절에 가서 기도를 드렸는데, 그 분 말씀이 '지금까지 기도를 잘 하고 있으니 앞으로 70일 동안에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위에 계신 어르신들께서 말씀하신다' 는 것입니다. 백만 원군을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기도만 열심히 한 것이겠지요. 자금이 없었기에 먼 곳은 가지 못하고 영남지역 일원에서 기도처라고 소문난 곳은 다 들렀습니다. 기도 중에는 마장이 많이 끼인다고 합니다. 정말 어려운 고비도 많이 넘겼습니다.
산사태가 일어나 기도처를 잃고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날 도와준 분이 1,000만원이 있으면 당장 신을 받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없던 돈이 어디에서 생기겠습니까?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며칠후 '그 분이 자기 몫 300만원은 포기할 테니까 제물 비용과 다른 이들에게 줄 비용 700만원이라도 준비해라 그러면 신을 받을 수 있다' 라고 말합디다.
열흘 전에 없던 1,000만원이, 700만원이 되었다 해서 구해지겠습니까?

그 때부터 새로운 고민을 했습니다.
아무런 대안은 없고, 이미 시작한 것이니 끝은 내야겠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습니다.
아무리 제 주위를 둘러 보아도 돈이 될 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돈을 빌릴 곳도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저 사람이 자기 몫을 포기하면서까지 날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 매우 고맙다 그리고 제물은 이 일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구나. 그러나 나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다.
어찌하면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나?' 자나 깨나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던 중에, 불현듯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위에 계신 분들께서 내가 처한 처지를 아실 것 아닌가? 돈 없는 나에게 먼저 돈을 벌게 해주시고 그 다음에 그 돈을 다 가져 가시면 될 것을. 힘 있는 분들께서 먼저 아량을 베풀어 주시면 되실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휙하고 뇌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내 몸을 먼저 바치겠습니다. 자! 받으십시오." 하고 큰 대자로 누워 누군지도 모르는 님에게 내 몸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몸이라는 그릇을 바치고 나니, 그 속에 있던 물건인 마음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더 결심했습니다. "자! 마음도 받으십시오. 그리고 이제부터는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러고 나니 한층 더 마음이 편안해 졌습니다.

지금까지 조금 더 기도하겠다고 퍼붓는 잠을 이기기 위해 발바닥을 바늘로 찌르지 않아도 되고,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 하고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담담하면서도 당당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이 몸도 마음도 내 것이 아니고 누구이신 지는 모르지만 내 모든 것을 받아 주신 그 분의 것이니까, 만약에 그 분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겠지 하는 자신감이라고나 할까요?"

"만약에 그 분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그것도 또한 당신의 뜻일 테니까, 그 뜻에 따르면 될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기도에 들 때, 100일 기도 후 앞으로의 삶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면 자결하기로 결심을 했었기에 그대로 실천에 옮기면 되니까요.

그러니 그 때부터 잠이 오면 자고, 기도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면 기도하고, 산에 가고 싶으면 산에 가고, 바다에 가고 싶으면 바다에 가고, 절하고 싶으면 절하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당신의 뜻이라 믿고 따른다는 자세로 기도를 했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었기에 수많은 고비가 있었습니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어느 누구도 내가 겪는 정신적인 고통에 대해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위의 동료는 물론 부모, 형제들도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미치도록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돈이 없어 사람으로 할 도리도 다하지를 못했으니, 그 때의 정신적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이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소리내어 울기도 많이 울었고, 때로는 가슴에 새기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견디기 어려웠던 일은, 나에게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산신각을 제공해 준 나이 많은 여자 분이 얼마나 나를 괄시를 하는지, 정말 견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고 게으르다느니, 깨끗하지 못하다느니,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하는데 정말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나를 이끌어준 그 분에게 "죽어도 그 곳에서는 기도를 할 수 없다" 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죽었으면 죽었지 그 산신각에서는 기도를 못하겠다" 고 말입니다.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이지, 그 노파를 위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만약 당신이 하는 말이 옳다면 며칠 내에 그 산신각에 갈 수 없는 일이 생길 것이니 그리 알고 기도나 열심히 해라"
"아! 내가 몸도 마음도 다 바쳤다고 한 놈이 정말 웃기는 짓을 하고 있구나."

'그래 기도나 열심히 하자. 내 살 길은 기도뿐이다.' 라고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그런데, 사흘 후에 조그만 비가 왔는데 산에서 큰 바위가 그 산신각이 있는 곳에 떨어져서 그 곳이 출입통제지역으로 묶여 버렸습니다.
자연히 그 곳에서 기도를 할 수 없게 되어버렸지요. 앞에서 그 분이 말한 산사태가 난 것입니다.
그 노파에게는 대단히 미안했지만, 한편으로는 '위에 계신 분들께서 나를 택해주셨구나' 생각들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늘을 우르러 보며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때가 기도 90일째였습니다.
100일 기도 중의 나머지 10일간은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중에는 많은 기미도 있었는데, 100일 기도가 끝나도 아무런 변화를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나를 택해 주셨다는 확신이 설만큼 많은 표시를 주셨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가히 '미칠 것 같다' 라는 표현외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일백 하루째를 그냥 보냈습니다. 그리고 일백 일하고 이틀째 되는 날 오후 3시경이었습니다.
문득 '이렇게 무작정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높은 분들의 뜻을 받들 자세를 갖춰야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제가 기도한 곳 중의 한 곳인 제석골이라는 곳에 올라갔습니다.
조그마한 기도용 초 넉 자루, 향 한 봉지가 제가 준비한 제물의 전부입니다.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곳에 자리를 잡고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조상님들부터 내려서시면서 "고생 많았다. 장하다" 하시는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강림하셨는데 도와주는 이 한 사람 없으니 과연 올바른 길로 들어섰는지 어떤지도 저는 몰랐습니다.

약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 기도가 끝이 났습니다.
그 다음 날. 내 자신도 어제의 일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다시 제석골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어제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문을 열고 천문을 연 것이니 누구에게 검정을 받아야겠다 싶어서, 나를 도와준 그 분에게 뛰어가다시피 달려갔습니다.

어제, 오늘 일어난 현상을 설명하고, '한번 검정해 주십시오' 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제석골로 와서 그 분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칠월 칠석 날에 '고향 당산에 가서 기도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 이라며 '같이 가주시겠다' 고 까지 해주시는 것입니다.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그리 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말이 고향이지 사실 저는 어릴 때에 외가댁에 몇 번 가본 기억뿐인 타향이나 마찬가지이었습니다. 먼 친척 분들은 계신다고 말은 들었습니다마는, 저는 그 동안 교류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특히 신이 어떻고, 영이 어떻고 하면 그들이 과연 내 입장을 이해해 주실까 하는 것이 더욱 두려웠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 길이 아니면 내가 살 수 없고, 또 몸도 마음도 다 바쳤으니 위에 계신 분들께서 나아갈 길을 마련해 주시겠지' 하는 당당한 마음이 생겨 고향으로 갔습니다.
당산을 관리하시는 이장님을 찾아뵈니 '당산은 신성한 곳이라 아무에게나 개방할 수 없다' 고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물러날 수 없어 친가와 외가의 어른들의 함자를 말씀드려도 모른다 하시니, 기가 찼습니다. 순간, '우리도 남의 집 어른들의 함자를 잘 모르듯 아마 이 분도 그 어른들의 함자를 들어볼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이장님보다 연세가 조금 많은 외삼촌의 성함을 말씀 드렸더니 기억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형제들의 이름을 말하시는데 알고 보니 저의 모친과 동갑으로 소학교 동기생이라며 아주 반갑게 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곳까지 오게 된 연유와 이력을 말씀드렸더니, 충분히 이해하시겠다며 당산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분이 저를 더욱 더 이해하시게 된 것은, 그 분의 따님 중에 '당시엔 잘 선택하지 않는 식품공학과를 졸업한 여대생 한 사람이 있었는데, 졸업 얼마후 출가하여 삭발을 하고 승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40이 넘은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을 이해하신 것입니다.

'역시 나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택해주시는구나' 하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절묘한 수순을 밟아서 나를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드디어 천문을 열었습니다.
장장 4 간 반 동안의 기도 끝에 드디어 죽지 않아도 되는 길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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