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에서 말하는 실천원리가 우리들의 삶을 완벽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자애 자존과 무애 무착 그리고 영과 육의 공존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안목이나 시야로만 본 자애 자존과 무애 무착 그리고 영과 육의 공존을 말했지 하나님의 눈으로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명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도 잘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명당의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행복이나 평안이 한계를 지닌 행복이요 평안이기는 합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살고 싶고 정신적으로 편안하게 지내고 싶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싶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끝없이 실패를 반복하는 불행한 사람들은 명당의 가르침을 받아 실천하며 산다면 분명히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영위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애지중지 갈고 다듬는 이 몸뚱아리도 죽으면 썩어 없어질 하찮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썩어 없어질 몸뚱아리가 없다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 아내(남편)가 내 자식이 혹은 내 부모가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면 내 아내(남편)에 대한 애뜻한 사랑은 어떻게 표현할 것이며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또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날 낳아준 부모를 아무리 잘 모시고 싶어도 내가 이 세상에 살지 않는 한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심불리기(心不離氣) 기불리심(氣不離心) 신재기중(身在其中)
성불리명(性不離命) 명불리성(命不離性) 정재기중(精在其中)
감불리식(感不離息) 식불리감(息不離感) 촉재기중(觸在其中) 이라 했습니다.

내 몸뚱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고 가질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현존하는 수많은 종교에서는 이 세상의 삶은 일시적이고 유한한 것이니 집착하거나 애착을 갖지 말라 하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삶 자체가 찰나적인 것이니 근본적인 평안을 얻기 위해 선행을 베풀고 물질에 현혹되어 남들에게 가슴 아픈 짓을 하지 말라 합니다 .
그리고 "욕심을 버려라" 혹은 "마음을 비워라" 하고 가르칩니다.
더 나아가 "마음을 비우련다는 그 마음 자체도 비워라" 하고 가르칩니다.
여러분들은 "마음을 비울 수 있다“ 생각하십니까?
없습니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
마음을 말하는 우리가 마음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옳게 파악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 우리는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 합니다.
* 우리는 그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 합니다.
* 우리는 그 마음이 얼마나 큰지 알지 못 합니다.
* 우리는 그 마음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지 못 합니다.

"마음을 비우라" 하고 가르치는 그 사람들 역시 마음에 대해 알지 못 하는 어리석은 인간이니 그들 간에 이루어지는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안목으로 판단했을 때는 절대로 불가능한 "마음을 비우라"가 하나님의 눈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랐을 때는 너무나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마음을 비우라"로 변합니다.
마음을 채우면 마음을 비울 수 있습니다.
"마음을 채우십시오"

* 나를 이 세상과 인연을 맺어준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마음을 채우십시오.
* 나와 인연이 된 내 배우자를 지극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우십시오.
* 나의 분신인 내 자식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우십시오.
* 내가 일해서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게 직장을 마련해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채우십시오.
* 같이 즐겁게 생활하는 이웃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우십시오.

그리고 꼭 지켜야할 한 가지

* 온 우주를 창조하셔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간절하게 기도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채우십시오.
그러면 언젠가는 그 마음이라는 그릇이 마음에 가득 찬 사랑과 열성 그리고 기도하는 정성의 힘에 못 이겨 깨어질 겁니다.
마음이라는 그릇이 깨지는 그 순간 내 마음이 비워집니다.

마음이 비워진다는 것은 스스로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역할을 할 마음을 우리가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바로 내 몸뚱아리 속입니다.
내 목숨이 붙어있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귀하기 짝이 없는 것이 바로 내 몸입니다.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고 내가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게 하고 그 모든 것들을 향유할 수 있게 해주는 이 몸뚱아리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진정으로 내가 자애 자존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면 이 세상 만물 중에 귀하지 않은 것이 없고 필요치 않은 것이 없음을 너무나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내 자신입니다.
다만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이 이 간단한 삶의 원리를 모르고 헤매다 힘들고 고달픈 꼴이 되었습니다.
간혹 우리 주위에 ”나는 욕심을 버렸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내가 보기에 그 사람들은 갖은 노력을 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 했을 때에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애를 쓰는 인생에 있어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습득한 지식이나 경험에 우리 스스로가 발목을 붙잡혀 꼼짝하지 못할 뿐입니다.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공이라 했으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이 어쩌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때에 맞추어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 나를 즐겁게 해주는 나무들이 나를 힘들게 하라 했습니까?
강이나 바다 속에서 때를 지어 다니며 노니는 고기 때들이 여러분들을 못 살게 굴었습니까?
깊은 산속에 사는 각종 동물들이 우리를 힘들게 했습니까?
자연을 방안으로 가져온다는 허울 좋은 핑계로 분재를 키운다 난을 키운다 하면 그 때부터 인간이 그 좋은 식물들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때맞추어 물도 주고 영양분도 주어야 한다고 스스로 발목이 붙잡힙니다.

애완견을 방에서 키우다 보니 피부병에 걸릴라 약도 준비해야 합니다.
대소변 정리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합니까?
있는 그대로 보고 즐기면 될 텐데 인간의 품안으로 들여 놓으려는 그 순간부터 내가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객체에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내 품안에 안겠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내 스스로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인간이 고안하고 만든 것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속하지 못 합니다.
그러니 인간이 만들고 고안한 인륜, 윤리, 도덕 그리고 법률 등도 때가 되고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약 30년 전 (1970년대) 미국 가정의 이혼률이 높다고 그들을 무슨 짐승 쳐다보듯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실정은 어떻습니까?
양담배를 피우면 매국노로 취급되어 과중한 처벌을 받았던 때가 불과 몇 년 전입니다.
법률에 외제 담배 피우는 것은 죄라는 조항이 사라지자 그 순간부터 그냥 죄가 아닌 일상 생활이 되지 않았습니까?

칠거지악(七去之惡)
도대체 무슨 항목들이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 합니다.
이 시대에 칠거지악 운운한다면 뭇 여성들에게서 돌팔매질을 당해 죽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애 무착이라면 꼭 재물이나 명예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양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에 대한 집착과 애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주를 옳게 보기 위해서는 우주 바깥에서 우주를 바라보라 했습니다.
공자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공자의 생각 밖에서 안으로 쳐다보아야 하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공자가 아니라 공자가 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붙잡혀 꼼짝달싹하지 못 합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들도 그렇고 불교를 신봉한다는 불교도들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예수의 참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고 석가모니의 진정을 안다 하겠습니까?
달마의 면벽구년, 성철의 장좌불와 12년 과연 석가모니가 그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칭찬을 했겠습니까?
아니면 어리석은 놈들이라 핀잔을 주었겠습니까?
자기가 가장 예수의 본뜻을 옳게 이해했다고 각종 종파를 만들어내는 목회자들을 예수가 본다면 무엇이라 평하겠습니까?
하늘 높게 솟은 교회 건물이나 화려한 단청으로 치장한 사찰을 보는 예수나 석가의 처절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무애 무착
우리가 살면서 얻은 갖가지 지식과 경험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우리 본 모습을 찾는 것이 바로 무애 무착의 근본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이 세상은 존재 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세상은 그대로 존재 합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도 이 세상은 계속해서 존재 합니다.
인간이 무슨 능력이 있고 자격이 있다고 애착을 가지느니 집착을 하느니 합니까?

* 나는 이런 사람은 좋고 저런 사람은 싫다.
* 내가 좋아하는 과목은 ㅇㅇ이라 다른 과목에는 관심이 없다.
*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라 싫다.
* 나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만나기 거북하다.
* 내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미덥지 못하다.
* 내가 믿고 따르는 종교가 아니니 배척할 수밖에 없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들입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들은 제 생각이나 경험 혹은 지식과 다르면 무조건 배제하고 도외시하려는 이상한 작태를 보입니다.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닌데 남들의 모습을 무작정 따라 하려다 엎어져서 코가 깨지고 달리려다 가랑이가 째지는 꼴로 사는 것이 우리들 어리석은 인생이요.
그래서 스스로 장애를 만들어 고통 받고 장벽을 만들어 꼼짝 못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꼭 지켜야할 덕목이 있습니다.
마음껏 세상을 살되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남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말아라.
나의 한 끼 양식이 되어 내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항상 감사해라.


"영과 육의 세상이 공존한다"
"우리 인간은 부단하게 영적인 존재들의 영향을 받는다"
"이승과 저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형태가 달라 우리 인간들이 인식하지 못 할 뿐이다"
"우리 인간들이 영적인 존재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좀 더 맑고 밝고 능력 있는 영의 영향을 받으며 생활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은 더욱 윤택해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이 간단한 원리를 우리는 지금까지 알지 못 했습니다.

매일 부대끼며 살고 영향을 받으며 사는 영적인 존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인간들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었습니다.
석가모니가 나름대로 해법을 찾는다고 한 것이 불교요.
예수가 해법이라고 이 세상에 내놓은 것이 기독교입니다.
회교 또한 모하멧트가 해법이라고 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인류의 평안을 위해서 내놓았다는 그 놈의 해법이라는 종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죽었습니까? 내가 하는 말은 선이요. 남들이 하는 말은 모두가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똘똘 뭉친 그들이 과연 인류의 평안을 말할 자격이나 있다는 말입니까?
중국에서 역술이 발생한지 어언 이천년 이상이나 지났습니다.
그 때 그 당시의 학문이 무슨 신통한 재주가 있어 지금 이 시대에도 통용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똑같은 사주를 타고 태어나는 사람은 절대로 있을 수도 없습니다.

나는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 합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나도 태어난 환경과 조건이 다르고 성장하는 환경과 조건이 다른데 어찌 같은 사주를 받고 태어났으니 운운하며 사주를 들먹이는 사람들도 스스로는 한계를지닌 학문을 호구지책으로 삼고 있다는 진실을 숨기지는 못 할 겁니다.
신을 받아 부린다는 무당들은 근본적으로 “신‘에 대한 개념도 옳게 파악하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겨우 2대나 3대 조상들의 혼령이 무슨 대단한 능력이 있어 이 복잡다단한 세상일을 다 풀어 해결해줄 수 있겠습니까?
동자나 선녀라고 칭하는 아이들 귀신이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런 영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이 세상에 살 때에 하고 싶은 것 하지 못 하고 먹고 싶은 것 제 마음껏 먹지도 못 한 원 많고 한도 많은 원귀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 세상으로 편안하게 가지 못 하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헤매는 불쌍한 혼령들입니다.
어쩌다 "소 뒷발로 쥐잡기"라 다행스럽게 한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그 작은 것을 침소봉대해서 뭇사람들을 홀립니다.
궁극적으로는 내 자신에 대한 기도는 내 자신이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내 삶의 주역인데 누구에게 내 삶을 맡기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여러분들이 기도해서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역량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기도해서 응답을 얻을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 꼭 큰 능력이 있는 좋은 스승 밑에서 공부하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석가모니가 말하는 “전생의 업” 예수가 말하는 “원죄” 아무 의미 없고 뜻도 없는 말들이니 이제부터는 잊고 삽시다.
우리 인간이 영적인 존재들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면 좀 더 밝고 맑고 능력 있는 영들의 영향을 받아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권리입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허공이 바로 우리가 모르는 저 세상입니다.
저 세상에서의 일을 이 세상에 사는 힘없고 어리석은 인간들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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