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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6-10 14:31
04.09.29 박정희 시대는 캄캄한 암흑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글쓴이 : myeongdang
조회 : 416  

04.09.29 14:22

박정희 시대는 캄캄한 암흑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나는 41녀의 자녀를 둔 가정의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경제적으로 대단히 궁핍한 가정이었기에 공부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거의 매일 월사금을 내지 못해 교실 바깥으로 쫓겨났으니 당하는 나도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뚜렷하게 해결책도 가지지 못하신 내 부모님들의 마음은 어떠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날 어머님께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내가 보기에 우리 형제가 모두 다 공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렵다 그러니 어디 공장에라도 취직해서 돈을 벌면 밥은 걱정 없이 먹지 않겠습니까?"

누구 보다 자식들 공부에 애착이 많으셨던 우리 어머님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고는 펄쩍 뛰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에는 마늘을 까는 공장이나 생강을 까는 공장에도 취직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제조업을 하는 곳에는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미명으로 하루 세끼 밥만 먹여줘도 된다는 식이었으니 돈을 벌어 모은다는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 당시 조폐공사나 조선공사 같은 공기업에서 일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내 아버님께서는 일본에서 비료를 수입해서 판매하는 사업에 약간 관여하셨는데 5.16 혁명 이후 비료 수입에 관한 업무가 농협으로 이관되면서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자식들은 한참 크고 돈 들 일은 천지인데 졸지에 가장이 실업자로 전락하셨으니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고생했다고나 할까요.

물론 그런 시대 상황을 이용해서 권력의 힘을 빌어 큰 돈을 번 사람들도 있습니다.

동시에 시대 상황에 맞지 않아 정신적 물질적 피해도 입으신 분들도 많으십니다.

어찌 보면 나도 그런 시대 상황의 피해자라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울산 현대 조선으로 취직이 되어 갔는데 허허 벌판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까지 근무했으니 무슨 낙이 있었겠습니까?

매일 매일 술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겁니다.

그러다 그런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온다는 것이 내 인생이 흐트러진 첫 시발이었습니다.

그 당시 입사 동기 중에는 아직 그 회사에 근무하면서 고급 간부로 승진한 사람들이 있으니 내가 낙오자인 것은 틀림없지요.

그 시대 상황이 그랬는데 내가 견디지 못하고 인생을 길게 보고 생각하지 못했으니 당해도 쌉니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하면된다" 또는 "잘 살아보자"라는 의지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앞날을 위한 계획은 없이 마냥 옛 일에만 매달려있으니 국민들이 무슨 낙으로 살라는 말입니까?

50년도 더 지난 과거사를 지금 와서 어찌 판단한다는 말입니까?

죽은 사람을 붙잡고 무슨 책임을 논한다는 말입니까?

우리 민족 전체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합니다.

바깥으로 나가 독립운동 한 것만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고 나라 안에서 묵묵히 일한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입니까?

지금 열린당의 말대로라면 모든 국민들이 일제 치하가 싫다고 나라 바깥으로 나가 나라가 거들나야 옳은 일이란 말입니까?

박정희 시대는 그렇게 캄캄한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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